“나 요즘 팬터마임 배우고 있잖아.”
“그런 걸 왜 배워? 배우 될려구?”
“야, 배우는 아무나 되니? 그냥 재밌어서 배우는 거야.”
첫 번째 의문, 마임이 왜 재밌을까?
“봐봐.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잘하네, 재능 있네.”
“이건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야. 뭐냐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마임이 재밌는 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귤이 없는데도 마임은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게 한다.
해미(전종서)는 연기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고 욕망하면 된다고 말한다.
그리고 종수(유아인)에게
아프리카 칼라하리 사막에 사는 부시맨 이야기를 해준다.
부시맨에게는 두 종류의 굶주린 자, 헝거가 있는데,
리틀 헝거는 그냥 배가 고픈 사람이고 그레이트 헝거는 삶의 의미에 굶주린 사람이라고.
해미 자신이 그레이트 헝거였다.
그는 삶의 의미를 찾아 세상 끝까지 가고 만다.
그러나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보고 세상 끝에 서 보아도
해미의 허기는 채워지지 않았다.
사실 그 갈급함은 그렇게 채워질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삶의 의미 같은 건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삶의 의미랄 게 존재하지 않으니
그레이트 헝거의 춤을 춘다고 해서 삶의 의미를 맛볼 수는 없는 노릇인 것이다.
종수의 집 앞에서 해미가 춤을 춘 후 눈물을 보인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그렇다면 삶의 의미는 결코 경험될 수 없는 것일까?
그렇지 않다. 그녀의 말속에 부재하는 진리가 있다.
삶의 의미(귤)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삶의 의미(귤)가 없다는 걸 끝없이 잊어버리면서
정말 느끼고(맛보고) 싶다고 욕망하면 되는 것이다.
명사적으로 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동사적으로 망각하고 욕망해야 한다.
그러면 삶의 의미는 느낄 수 있는 무언가가 된다.
입에 침이 나오고 맛있게 된다.
없는 삶의 의미를 있게 해주는 '연극적 실천'(혜미의 마임)이 필요한 이유다.
삶의 의미를 현전하게 하는 힘은
부재하는 삶의 의미를 찾는 것이 아니라
부재하는 삶의 의미를 살아내는 연기이다.
삶의 의미가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삶의 의미가 부재한다는 것을 끝없이 잊어버리면서
삶의 의미를 욕망하고 그것을 연극적으로 실천할 때
삶의 의미는 부사적으로 감지되는 무엇이 된다.
맛볼 수 있는 어떤 것으로 언뜻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다.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2018.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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