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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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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밤 / 김수영 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강물 위에 떨어진 불빛처럼혁혁한 업적을 바라지 말라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 달이 떠도너는 조금도 당황하지 말라술에서 깨어난 무거운 몸이여오오 봄이여 한없이 풀어지는 피곤한 마음에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너의 꿈이 달의 행로와 비슷한 회전을 하더라도개가 울고 종이 들리고기적소리가 과연 슬프다 하더라도너는 결코 서둘지 말라서둘지 말라 나의 빛이여오오 인생이여 재앙과 불행과 격투와 청춘과 천만인의 생활과그러한 모든 것이 보이는 밤눈을 뜨지 않은 땅속의 벌레같이아둔하고 가난한 마음은 서둘지 말라애타도록 마음에 서둘지 말라절제여나의 귀여운 아들이여오오 나의 영감(靈感)이여 합동시집 (1957)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이가 한 해 한 해 늘어간다는 뜻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을 쓴다 어려서야 일 년도 헛먹은 일 없어 한 살만 많아도 형 노릇 언니 노릇 똑똑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먹은 나이만큼 존재의 실력이 자라는 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느 순간 나이는 그저 해마다 무차별적으로 부과되는 외적 규정일 뿐 무엇을 채워 넣었는가에 따라 의미가 연기(延期)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먹은 나이만큼 살았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나이에 관한 타자의 규정 따위야 아무 상관없지만 타자 바깥에서도 시간은 따박따박 흐르니 해마다 먹은 나이가 지나온 시간의 부고를 전하며 그간 먹은 시간을 결산하자 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부재하는 삶의 의미가 다가서고 답이 연기될 수록 삶의 방정식이 또렷해지니 내 삶..
돌아보지 않고 쓰기 어제 하루 종일 8시간 28분 동안 A4 용지 5페이지 남짓 글을 썼다. 문서정보를 보니 1643자, 200자 원고지 54.3장이었다. 아마도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일 것이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밝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늘 반복되었던 글쓰기 습관과 완전히 다른 글쓰기의 실천을 통해 우선 글쓰기라는 작업의 양적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를 기록하기 위함일 뿐이다. 비결이라면, 이미 쓴 글을 보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맞춤한 단어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과 유의어 사전을 헤매고, 문장을 하나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으며, 문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살피고, 쓰다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중요한 부분..
#수고했어요 #오늘도  왕뚜껑을 먹으려고 겉 비닐을 벗기니 뚜껑에 #수고했어요 #오늘도 라고 쓰여있다. 누가 하는 말인가? 제대로 된 점심시간도 없이 컵라면으로 끼니를 때우면서 부조리하고 비루한 삶에 의문을 갖는 이들에게 도대체 누가, 이리도 꼼꼼하게 위로를 건네는 걸까? 자본제적 사회의 전일적 힘은 때로는 폭력적 억압을 감추고 따뜻한 관심과 격려로 체계의 따뜻한 품속을 환기시킨다. 다 그런 거지 뭐, 괜찮아질 거야. 수고했어, 오늘도. 내일은 더 좋아질 거야. 부드러운 토닥임 속에서 날 선 분노는 수그러들고 권력의 누수는 차단되며 새로운 삶이나 가치의 꿈이 희미해져 가는 만큼 타자의 폭력적 시나리오를 연기하는 순치된 삶은 이어진다. 참 디테일하게 너도 고생이 많다. #수고했어요 #오늘도
견디기로 한다. 글을 싸(써)지르고 하루 이틀이 지나고 나면 써버린 글에 대한 이런저런 불편한 마음이 매번 찾아온다. 불현듯 무엇을 덧붙이거나 빼고 싶다는 충동, 내용에 대한 이런저런 아쉬움, 나 자신도 수십 번 씩 단어들 속을 헤매야 찾을 수 있을 어떤 실수에 대한 불안 등이 그것이다. 지금도 어제 쓴 글을 보고 싶고 수정하고 싶은 마음이 인다. 그러나 보지 않았다. 견디기로 했다. 그러니 견디기로 한다. 쓰는 행위가 쓴 행위에 대한 강박적 반성으로 멈추지 않도록 작은 돌멩이의 운명 같은 것일지라도 나에게서 나온 글이 그 자신의 운명을 살아가도록 그냥 두기로 한다. 반성이 실은 타자의 요구이며 결국 타자가 만들어 놓은 규범을 반복하는 것이라면, 그리고 그 요구를 응하는 것이 새로운 글은 차치하더라도 글 자체를 쓰지 못..
그냥 쓰기로 한다 나의 글쓰기가 늘 좌절되곤 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도 자유롭게 글을 쓴 적이 없었던 것 같다. 글을 쓸 때면 언제나 형식적인 부분과 내용적인 부분에 강박적으로 집착한다. 맞춤법, 단어 선택, 문장 구조, 출처 확인, 논리, 구성, 체계 등 많은 사항들을 체크하고 또 체크하면서 간신히 간신히 한 문장 한 문장 이어나간다. 당연히 시간은 한도 끝도 없이 길어지고 쓰고 싶은 이야기를 쓰지 못한 채 마무리되곤 했다. 글을 다 쓴 후에도 자신의 글을 200번이나 첨삭했다는 헤밍웨이만큼은 아니더라도 강박적으로 글 주변을 바장인다. 평균 20번 이상은 글을 다듬어야 맘이 놓이곤 했고, 이젠 됐다 싶을 정도로 쓰고 나서도 글을 보면 보이는 표현이나 문장 문제를 슬쩍 고치곤 한다. 단순히 어떤 생각이나 느낌을 편하..
지옥 신이 존재하고 정의를 실현한다면 전두환은 '고지' 받고 '시연' 당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런 신은 존재하지 않는다. 전두환은 거의 무병장수했고 무고한 이들이 비명에 갔다. 지옥도 천국도 없다. 인간 스스로 진정으로 인간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해야 한다. 그렇지 못했던 일이 역사 속에 쌓여있다. 전두환 사면이 그 중 하나다. 인간이 하거나 하지 못한 일이 인간의 세상을 지옥이나 천국에 가깝게 만들 뿐이다. 저는 신이 어떤 놈인지도 모르고 관심도 없어요. 제가 아는 건 여긴 인간들 세상이란 거예요. 인간들 세상은 인간들이 알아서 하는 거죠. 연상호, 최규석, 의 마지막 대사 중에서 의 '시연' 장면 (출처: 일간스포츠) https://news.v.daum.net/v/20211123102941856 전두환 전..
우울할 땐 세로토닌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항우울제를 다시 복용해 볼까, 생각한다 아직 적잖게 남아 있고 많이 힘들면 더 먹으라고 준 자나팜 0.25밀리그램은 작은 약통 안에 거의 그대로 있다 ... 높은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자살에는 전조가 있고 주변에 보내는 신호가 있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돌이켜 보면 가슴 한편에 아프게 남아 있는 후배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결행의 순간은 서서히 소진된 인간의 최후의 임계점은 이전의 순간과 연속적이지 않고 이전의 인과로 환원되지 않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사건 아닐까 ... (어쩌면 몽상인지도 모를) 꿈을 꾸었다 저편에서 한 사내가 걸어와 손을 내민다 잡고 보니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에서 온 나인 것 같다 나는 내가 낯설었는데 지나온 시간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