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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돌아보지 않고 쓰기

어제 하루 종일 8시간 28분 동안 A4 용지 5페이지 남짓 글을 썼다. 문서정보를 보니 1643자, 200자 원고지 54.3장이었다. 아마도 개인 통산 최고 기록(?)일 것이다. 무슨 대단한 일이라고 밝히는 게 아니다. 지금까지 늘 반복되었던 글쓰기 습관과 완전히 다른 글쓰기의 실천을 통해 우선 글쓰기라는 작업의 양적 결과가 어떻게 달라졌는지 가시적으로 보여주는 수치를 기록하기 위함일 뿐이다.

 

비결이라면, 이미 쓴 글을 보지 않고 무조건 앞으로 내달리는 것이었다. 지금까지 글을 쓸 때면 언제나 맞춤한 단어를 찾기 위해 국어사전과 유의어 사전을 헤매고, 문장을 하나 쓰고 고치고 쓰고 고치는 과정을 반복했으며, 문단이 자연스럽게 연결되는지 살피고, 쓰다 주저하게 되는 부분이 있으면 책을 보고, 중요한 부분은 따로 파일을 만들고 정리도 하면서 글을 썼다. 여기에 글을 쓰는 동안 흐름을 끊고 들어오는 여러 일들, 예컨대 메일과 카톡 회신 같은 급히 처리해야 할 여러 일들에 의해 글쓰기의 연속성은 깨지기 마련이었다. 한마디로 수없이 딴짓하며 글을 썼다는 것인데, 정작 글 자체를 쓰는 시간보다 부수적인 작업을 하는 시간이 더 많았던 것이다.

 

한글 워드프로세서의 경우 맞춤법 도우미 상시 작동을 시킬 수 있다. 나는 이게 글 쓰는 데 도움을 준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언젠가부터 맞춤법이 맞지 않는 단어에 빨간색으로 밑줄이 그어지는 것이 신경 쓰이기 시작했다. 그 빨간 줄은 자꾸 글쓰기의 기본이 맞춤법이니 이것부터 고치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그걸로 끝이 아니었다. 그것은 다시 글쓰기의 기본이라 배웠던/알았던 것을 환기시킨다. 그 빨간줄로 촉발된 요구는 주술 구조와 문장 호응, 구성 같은 것은 물론 내가 쓰는 글의 특성상 내용의 정확성이나 시의성 같은 것도 무시해선 안 된다는 것을 사실을 신경 쓰게 하는 일로 이어졌다.

 

혹자는 글을 통해 삶이 변화될 수 있다고, 글쓰기가 이전 삶과의 단절을 이뤄내는 하나의 성사(聖事)일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럴 것 같기도 하다. 그러나 글쓰기를 존재의 숙명으로 받아들이기는커녕 삶의 일부도 되지 못한 나에게 그 가능성은 아직 넘볼 수도조차 없는 먼일처럼 느껴진다. 그러나 당장 뒤돌아보지 않고 글을 쓸 때 나에게서 흘러나오는 어떤 가능성을 보게 된다. 문장이니 구성이니 하는 것을 신경 쓰지 않으니 오직 글쓰기 자체에 집중할 수 있게 되고, 글쓰기가 좀 더 자유롭게 느껴진다. 글을 쓰다 좌절하는 일이 적어졌고 예기치 않은 희열을 경험할 때도 종종 있다.

 

물론 나중에 보면 이렇게 싸(써)지른 글에서 이런저런 불편한 느낌이 들 것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런 느낌 속에서 이미 쓴 글에 매달려 고치고 또 고치는 작업을 반복하고 싶지 않다. 기존 글을 더 좋게 만들려는 작업은 마땅한 요구의 외피를 쓴 타자의 권력 아닌가? 글을 잘 쓰고자 하는 욕망에는 좋은 글에 대한 규정에 숨어 있는 타자의 요구에 대한 순응이 감춰져 있는 것 아닐까? 좋은 글을 쓰려고 할 때 나는 이미 타자의 요구를 반복하는 것이며, 그렇게 함으로써 정작 나는 나의 글을 쓸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타자의 요구에서 벗어나 이전과 다른 글쓰기를 반복할 때 어쩌면 쓰일 수 있을 어떤 글, 이전에 한 번도 써보지 못한 글에 도달할 수 없게 되는 것 아닐까?

 

기존에 도달한 사유의 지점과 그것을 드러내고 있는 글을 고치고 또 고쳐봐야 윤색(潤色)에 불과하다. 그러한 작업에 매몰될 때 이전과 다른 글쓰기를 통해 늘 새롭게 도달할 지점으로부터 그만큼 더 멀어진다. 글에 윤이 나게 하는 일을 멈춘다. 윤이 나는 글을 쓰려는 욕심도 버린다. 쓰기를 주저하게 하는 작업을 중단하고, 오직 읽고 생각하고 쓰는 작업을 반복하면서 이전에 써보지 못한 글, 이전에 도달하지 못한 사유, 결코 쓰여지지 않은 이야기에 항상 새롭게 도달하도록 쓰는 일을 반복하기로 한다. 돌아보지 않고 쓰기를 다시 다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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