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느낌

나이를 먹는다는 건

나이가
한 해 한 해 늘어간다는 뜻으로
나이를 '먹는다'는 표현을 쓴다


어려서야 일 년도 헛먹은 일 없어
한 살만 많아도 형 노릇 언니 노릇 똑똑하지만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먹은 나이만큼 존재의 실력이 자라는 건 아님을 알게 된다
어느 순간 나이는 그저 해마다 무차별적으로 부과되는 외적 규정일 뿐
무엇을 채워 넣었는가에 따라 의미가 연기(延期)되는 텅 빈 기표가 된다


어떻게 살아야 할까

어떻게 살아야 먹은 나이만큼 살았음을 증명할 수 있을까

나이에 관한 타자의 규정 따위야 아무 상관없지만

타자 바깥에서도 시간은 따박따박 흐르니

해마다 먹은 나이가 지나온 시간의 부고를 전하며

그간 먹은 시간을 결산하자 한다

 

나이를 먹을 수록 부재하는 삶의 의미가 다가서고

답이 연기될 수록 삶의 방정식이 또렷해지니

내 삶이 요구하는 것은 

결산표에 기성의 기준들이 포함되지 않도록 경계하는 것

목적과 의미의 부재가 삶의 본질임을 인식하는 것

필요도 쓸모도 없는 의욕 속에 해가 현전하도록 사는 것

그러니 먹은 나이의 최후가

이미 삶을 통해 증명된 것이도록

소리 내 글을 읽고 또박또박 글씨를 쓰자

선악도 미추도 없는 명정(銘旌)으로 사라질 때까지

헤진 분묘 곁 무성의 묘목(墓木)처럼 굳건히 서 있도록 하자

 

그러면 나이를 먹어가는 일의 의미는

지금 이 순간 삶에 상향(上香)하는 시간 속에

언뜻 부사적 좌표를 남기지 않을까

아마 그럴 것이다

먹을 나이를 모두 소진한 뒤에야 드러날 그 실체가

희미한 명경 속에서나마 모습을 드러낼 것이다




(사진은 말년의 니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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