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카르트는 <성찰>의 "네 번째 성찰"에서 지성(intellectus)과 의지(voluntas)를 구분한다. 지성은 실재에 대한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의지는 지성이 인식한 것을 하거나(긍정하거나 추구하거나 믿거나) 또는 하지 않기로(부정하거나 피하거나 믿지 않기로) 결정하는 정신의 능력을 말한다. 지성이 실재를 파악하는 정신의 "인식 능력"이라면, 의지는 지성이 파악한 것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선택 능력, 즉 자유 의지"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지성이 의지로 하여금 긍정하거나 부정하도록 혹은 추구하거나 피하도록 어떤 것을 제시할 때, 의지는 그러한 "외부의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렇게[긍정하고 부정하고...] 하는 데에 존립"한다.
그는 비결정성을 "가장 낮은 단계의 자유"(무차별적 자유, liberty of indifference)로 규정하고 전적인 자유가 반드시 "비결정의 상태"를 함축하는 것은 아니라고 물러선다. 자유의지와 결정론의 양립가능론(compatibilism)을 주장하는 듯한 여지를 남기는 것이다. 그러나 내 안의 지성은 더 큰 이해 능력을 생각할 수 있는 유한한 것인 반면, 내 안의 의지는 "그보다 더 큰 것의 관념을 포착할 수 없을 정도로 큰 것으로 경험하는 것"이다. 나아가 의지는 우리가 "신의 형상과 유사한 모습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기도 하다. "1645년 2월 9일 메슬랑에게 보낸 편지"에서 데카르트는 분명하게 선이라고 알려진 것이나 참이라고 지각된 것일지라도 우리가 그것을 하기를 망설이는 일이 항상 있을 수 있다고 말한다. 의지는 그러한 "자기규정적인 자율적 능력"(an autonomous power of self-determination)인 것이다.
이는 그가 오류를 지성에 반하는 의지의 "그릇된 사용"에서 발생한다고 한 것에서도 간취할 수 있지 않을까? 데카르트에 의하면 "의지의 활동 범위가 지성보다 더 넓기 때문에" 지성이 명석판명한 관념을 제시함에도 불구하고 의지가 그것을 긍정하지 않기로 결정하거나 혹은 지성의 애매모호한 이해를 의지가 긍정하기로 결정하는 일이 일어날 수 있는 바, 이것이 바로 오류의 발생 메커니즘이다. 따라서 "지성이 명석판명하게 보여주는 것에만 판단을 내리도록 의지를 묶어 둔다면, 그는 우리가 오류를 범하는 일은 결코 없을 것"이라고 역설한다. 그러나 이 주장은 오히려 의지가 오류를 범하는 일이 매우 흔한 일이며 의지를 지성에 "묶어 두는" 일이 불가능하다고 인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어쩌면 그의 오류 이론은 그가 자기규정적인 자유의지에서 벗어날 수 없음을 방증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윤리학> 2부 정리48-9이 염두에 두고 있는 것은 데카르트의 이러한 지성과 의지 개념이다. 두 가지 문제에 비판은 집중된다.
정리48은 의지의 무제약성과 허구성에 대한 비판이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관념 또한 다른 모든 독특한 실재들처럼 "다른 원인에 의해 실존하고 작업하도록 규정"된다.(E1p28) 따라서 하나의 관념인 의지 또한 "어떤 원인에 의해 이것이나 저것을 의지하도록 규정"되는 것이지 "자신의 행위들의 자유로운 원인일 수 없다." 정신에는 "의지하기(volendi)와 의지하지 않기(nolendi)의 절대적인 능력(facultas)" 같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E2p48d) 다른 것의 규정을 받지 않고 (무언가 하거나 하지 않으려는) 각각의 '의지작용'(volitio)을 산출하는 자기규정적 자유의지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것은 '이성적 존재'(사고상의 존재, ens rationis)일 뿐이다. 그래서 스피노자는 "인간이 베드로나 바울의 원인일 수 없듯이 의지를 이런저런 개별적 의지 행위의 원인으로 생각하는 것은 불가능하다"('편지2')고 역설한다. 어떤 원인들에 의해 산출되는 각각의 의지 작용이 있는 것이지 의지라는 독립적 능력이 있는 것이 아니다.(스피노자가 <윤리학> 3부 정리9의 주석에서 말하는 의지는 이러한 의지이다.) 데카르트는 의지의 무제약성("어떤 울타리에 갇혀 있지 않음")을 적극적으로 주장하면서 자유의지를 다른 피조물들과 인간을 구분해 주는 지표로 삼기도 하지만, 이는 "자연 안의 인간을 국가 속의 국가(imperium in imperio)인 것처럼 인식"(E3pref)하는 것에 불과하다.
정리49는 지성과 의지의 독립성에 대한 비판이다. 무규정적인 자유의지가 존재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경험하는 의지작용은 무엇인가? 스피노자에 의하면 우리의 정신에서 벌어지는 일은 지성이 먼저 이를테면 삼각형에 대한 관념을 갖고 나중에 지성과 구별되는 의지작용이 그 관념의 내용(삼각형의 세 각은 두 직각과 같다)을 긍정할지 말지 혹은 믿을지 말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이러한 긍정이나 믿음은 애초에 삼각형 관념을 함축한다. 따라서 삼각형 관념 없이 인식될 수 없다. "삼각형을 인식함에 있어서(in conceiving of a triangle) 우리는 이미 이것[삼각형의 내각의 합은 두 직각과 같다는 것]을 긍정하고 그것의 모순을 부정하고 있다."(Allision 1987, 122) 삼각형의 관념 역시 이러한 긍정을 함축한다. 따라서 그러한 긍정 없이 인식될 수 없다. 요컨대 삼각형 관념과 삼각형 관념의 내용을 긍정하는 것은 상호함축적이다. 어떤 것에 대한 관념에는 이미 그것에 대한 긍정/부정, 추구/회피, 믿음/불신 같은 것이 함축되어 있고, 그 반대도 마찬가지인 것이다. "삼각형의 세 각은 두 직각과 같다는 점을 긍정하는 어떤 독특한 의지 작용, 곧 사유 양태를 생각해보자. (...) 이러한 긍정은 삼각형의 관념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 더욱이 이 삼각형의 관념은 이 동일한 긍정을 함축해야 한다. (...) 그러므로 역으로 이 삼각형의 관념은 이러한 긍정 없이는 존재할 수도 인식될 수도 없"다. 스피노자가 삼각형 관념과 삼각형 관념의 내용을 긍정하는 것을 마치 어떤 실재와 그 본질의 관계(E2d2)와 마찬가지라고 했던 것은 양자 간의 상호 함축적 관계를 염두에 둔 것이다.
여기에서 다시 두 가지 쟁점이 도출될 수 있다.
첫째, 의지와 지성은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라는 점이다.(E2p49c) 어떤 실재와 그 실재의 본질이 상호 함축적이고 존재나 인식을 위해 서로에게 의존하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듯, 의지 작용과 하나의 관념 또한 서로를 함축하는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따라서 의지 작용을 산출하는 의지와 관념을 산출하는 지성 또한 하나이자 동일한 것이다. 유의할 것은 앞서 지적했던 것처럼 의지나 지성은 의지 작용이나 관념과 떨어져 있는 어떤 독립적 능력(facultas)이 아니라는 점이다. 따라서 의지와 지성이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라고 할 때, 이는 각각 의지 작용 및 관념과 독립적인 하나의 능력으로서의 의지 및 지성이 동일하다는 것이 아니다. "정신 안에는 어떠한 절대적인 이해하기(인식하기, intelligendi)와 욕망하기, 사랑하기 등의 능력도 존재하지 않는다."(E2p48s)
둘째, 약간 다른 맥락이지만 어떤 의지 작용으로 변용되지 않은 의지 능력, 어떤 관념으로 변용되지 않은 지성 능력이 있을 수 없다는 점 또한 지적될 필요가 있다. 그러한 능력을 상정하더라도 이는 그것의 활동성과 동연적(coextensive)이어야 한다. 그 능력은 항상 이미 어떤 의지 작용이나 관념의 산출로 현행화되기 때문이다. 이는 앞서 지적한 것처럼 임의의 의지 작용이나 관념의 산출로 그 활동성이 드러나지 않는 독립적 의지나 지성의 능력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뜻한다. 연장 속성의 행위 역량 또한 마찬가지이다. 그것은 항상 이미 물체의 산출로 현행화된다. 스피노자의 철학이 순수한 현실성의 철학, 가능성이 부정되는 철학으로 평가되어 온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물론 여기에는 다른 해석이 가능하고 그만큼 길고 풍부한 논쟁이 있다.)
데카르트가 인식 능력으로서의 지성과 선택 능력으로서의 의지를 구분한 것은 이제 정신의 사유 역량과 그 변용(관념)에 의해 일의적으로 설명된다. '오컴의 면도날'에 의해 사고상의 존재에 불과한 지성과 의지라는 능력은 제거된다. "지성과 의지가 이러저러한 관념이나 이러저러한 의지 작용과 맺는 관계는 돌멩이라는 것이 이러저러한 돌멩이와 맺는 관계 아니면 사람이라는 것이 베드로나 바울과 맺는 관계와 동일하다." 돌멩이라는 보편자나 사람이라는 보편자가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지성과 의지도 실재하지 않는다. 나아가 어떤 원인에 의해 규정되는 관념 외에 별개의 의지 작용을 가정하는 것도 불필요한 존재를 늘리는 것이다. 관념과 의지 작용(긍정, 믿음, 추구 등)은 상호 함축적인 하나이자 동일한 실재이기 때문이다.
정리49를 마무리하면서 스피노자는 이러한 학설이 "삶의 용도"에 어떠한 도움이 되는지 확신에 찬 어조로 말한다.(E2p49s) 그 학설의 핵심 중 하나가 자유의지에 대한 부정임은 두 말할 나위 없다.(그만큼 중요한 것은 '비목적론적 사고'일 것이다) 그가 말하는 도움은 개인적 차원과 사회적 차원의 도움으로 나누어 제시된다. 간추리자면 앞의 차원에서 그것은 "최고의 행복 또는 지복"에 이르도록 돕는다는 점에서 그러하고, 뒤의 차원에서는 시민들을 노예가 아니라 "자유롭게 가장 훌륭한 것을 행하도록" 이끈다는 점에서도 그러하다. 요컨대 "정신의 본성과 기원"에 대한 자신의 고찰은 "우리를 마치 손으로 이끌 듯이 인간 정신 및 그것의 지복으로 인도할 수 있는 것들"인데(E2pref), 그 중심에 자유의지의 부정이 있다. 어떻게 자유의지를 부정하는 것이 인간의 지복과 시민들의 자유롭고 훌륭한 삶을 견인할 수 있는가? 스피노자가 이하의 부에서 다루는 문제가 바로 그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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