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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트

므나세 벤 이스라엘과 유대인 영국 입국

기원전 1003년 다윗에 의해 통일된 이스라엘은 솔로몬 사망(기원전 922년) 후 내란에 휩싸여 기원전 930년 경 10개의 지파로 구성된 북 이스라엘 왕국과 2개의 지파(다윗 혈통의 유다 지파와 베냐민 지파)로 이루어진 남 유다 왕국으로 분열되었다.(열왕기상 11:43~12장 참고) 이후 북 이스라엘은 기원 전 722년에 아시리아(앗수르)에 의해 멸망했고 남 유다는 북 이스라엘 왕국 멸망 이후 136년 간 더 존속하다 기원 전 586년 바빌로니아(바벨론) 제국에 패망하게 된다.

 

바빌로니아는 남 유다 왕국의 백성들을 융합시키는 정책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두 지파는 순혈성을 유지할 수 있었던 반면, 아시리아는 이주 정책을 펴 북 이스라엘의 열 지파는 주변의 다른 민족들과 섞이게 되었고 결국 역사 속으로 사라지고 만다. 이른바 “잃어버린 열 지파”(Ten Lost Tribes)가 된 것이다. 그러나 이스라엘 백성에게는 장래에 메시아(mashiah, Christ)가 두 왕국을 통합할 것이라는  소망 내지 믿음이 있었다.(에스겔 37:12~28 참고)

 

유대인들이 예수를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던 이유는 기원 전 2~3세기경에 이미 메시아는 “잃어버린 열 지파”까지 규합하여 강력한 군대를 만들어 로마의 압제로부터 이스라엘을 구원할 인물이라는 “메시아사상”(메시아 대망론, Messianism)이 형성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원수에게 처형당한 무력한 예수 같은 존재는 그들이 믿었던 강력한 군사적ㆍ정치적 지도자로서의 메시아상(像)과 너무나도 달랐던 것이다. 유대인들의 메시아 대망은 이후 계속되었고 자신들에 대한 적대감과 핍박이 커질 때 더 그러했다.

 

1644년 남아메리카에서 “잃어버린 열 지파”가 발견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온 데다 제1차 십자군 전쟁 이후 가장 참혹했던 1648년 폴란드 유대인 대학살로 “잃어버린 열 지파”와 결부되어 있던 메시아 대망론이 다시 크게 부상하게 된다. 그때 이 메시아사상을 이용해 영국에 유대인 입국 허용을 이끌어낸 이가 어린 스피노자가 암스테르담의 탈무드 토라 학교(Talmud Torah School)에 다닐 때 선생이었던 므나세 벤 이스라엘(Menasseh Ben Israel, 1604–57)이다.

 

17세기 초반 암스테르담 유대인들은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고 유대 전통을 따르는 것도 용인되었지만 시민권도 없고 길드 가입도 금지(1632년)된 불안정한 하급 시민 상태였다. 이런 상황에서 1648년 폴란드 대학살로 유대인 피난민들(아슈케나지 유대인들)이 서유럽으로 밀려들자 네덜란드의 세파르디 유대인들은 네덜란드에서도 반유대주의가 고개를 들지 않을까 걱정하기 시작했다. 이에 네덜란드 유대인 공동체를 이끌던 랍비 므나세 벤 이스라엘은 유대인 피난민들을 스웨덴이나 영국으로 이주시킬 계획을 세우게 된다.

 

1649년 영국 내 대표적인 친유대 세력이었던 청교도들이 왕당파에 승리를 거두고 의회를 장악하자 그들의 수장 올리버 크롬웰에게 전쟁 비용을 댔던 므나세는 1650년에 그에게 유대인 재입국을 허락해 달라고 청원한다. 1290년 에드워드 1세의 유대인 추방령 이후 막혀 있던 터였다. 1651년에 크롬웰이 ‘항해조례’를 반포하여 네덜란드 해안을 봉쇄하고 해상무역을 장악함에 따라, 유대인들의 영국 이주는 동쪽에서 오는 피난민들뿐만 아니라 해상무역에 종사하던 암스테르담의 유대인들에게도 중요한 문제였다. 항해조례로 시작된 1차 영국-네덜란드 전쟁으로 답보 상태에 있던 유대인 입국은 1655년 9월 므나세가 런던으로 크롬웰을 찾아가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되고 우여곡절 끝에 1656년 사실상 묵인된다. 360여 년 만의 일이었고, 해적질이나 하고 살던 영국 경제 부흥의 서막을 장식한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영국의 유대인 입국 묵인은 영국과 유대인의 이해관계가 맞아떨어진 결과였다. 영국은 유대인의 자본과 역량이 필요했고 유대인은 신흥 해상 무역 중심지로 부상한 영국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영국 의회를 장악한 청교도들의 친유대 성향과 “천년왕국설”(millennialism)에 대한 믿음도 주요했다. 천년왕국설은 그리스도가 최후의 심판 이전에 지상에 재림하여 1,000년 동안 통치하는 낙원이 도래한다는 믿음인데(요한계시록 20장 1~6절에 근거한다), 헨리 핀치 경(Sir Henry Finch)의 <세계의 위대한 회복 또는 유대인의 소명>(The World’s Great Restauration, or Calling of the Jews, 1621)에 따르면, 당시 영국에는 천년왕국설을 신봉하는 사람이 많았다고 한다.

 

므나세는 영국의 천년왕국운동에 관여하고 천년왕국설을 주장한 <이스라엘의 희망>(Spes Israelis)을 쓰기도 한 인물이었다.(저작 동기 자체가 유대인 입국 문제와 무관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는 “땅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온 땅에 있는 만백성 가운데 너희[이스라엘 민족]를 흩으실 것”(신명기 28:64)이라는 성경의 예언에 따라 “땅 끝”(크레 하 아레츠Kezeh ha-Arez, 중세 히브리어로 영국을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인 영국에까지 유대인이 들어와야 메시아의 재림이 앞당겨질 것이라고 믿었고 이를 적극 주장함으로써 크롬웰을 설득했다고 한다. 므나세가 기다리던 메시아가 청교도들이 기다리던 메시아와 달랐을 터인데, 흥미로운 부분이다. “범종교적인”(ecumenical) 랍비라는 평가를 받는 그의 면모를 잘 보여주는 일화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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폴 존슨, 김한성 옮김, <유대인의 역사>, 포이에마, 2014, 471~477쪽.

홍익희, <유대인 이야기: 그들은 어떻게 부의 역사를 만들었는가>, 행성B, 435~440쪽.(특히 청교도들의 친유대적 성향에 대해서는 353~4, 436~8쪽 참고)

Steven Nadler, Menasseh ben Israel:Rabbi of Amsterdam, Yale University Press, 2018, 7~8장 참고.

 

 

 

(2021-01-27 09: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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