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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애도하지 않겠습니다

"더 적게 회상하고 더 적게 의식할수록 과거는 그만큼 더 많이 반복된다-반복하지 않으려면 회상하시오, 기억을 철저히 되새기시오. (중략) 사실 유령처럼 되돌아오는 사자(死者)들이야 말로 합당한 경의를 받지 못한 채 너무 빨리, 너무 깊이 매장된 자들이 아닐까. 그리고 후회란 기억의 과잉을 드러낸다기보다는 기억 내용의 철저한 되새김에 대한 무능력이나 실패를 나타내는 것이 아닐까?" - 질 들뢰즈, <차이와 반복> 중에서

 

 

사진출처: 뉴스 영상 갈무리

 

 

영정도 위패도 없다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는 팻말뿐이다

저 팻말은 말한다

얼굴도 이름도 기억할 필요 없다

희생자 아닌 사망자이며

참사 아닌 사고일 뿐이다

 

일어나지 말아야 했고

일어나지 않을 수 있었던 참사로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이태원 사고 사망자"라는 여덟 글자 아래 

서로 다른 얼굴과 이름 서로 다른 사연을 가진 

백 쉰여섯 명의 억울한 죽음이

다시 압살 되었다

 

책임져야 할 자들이 오히려

슬픔을 정치적으로 이용하지 말라 한다

지금은 추궁할 때가 아니라 추모할 때라고 요설하고

희생자를 사망자로 참사를 사고로 규정하고는

변명 거리와 책임 전가 대상을 찾느라 분주하다

 

왜 이런 일이 벌어졌는가

왜 예방하지 못했는가

왜 구하지 못했는가

국민의 생명과 안전이 1순위여야 할 국가는

어디서 무얼 하고 있었는가

 

고통스럽게 묻는 이들에게

어떤 이들은 슬픔을 정치에 이용하지 말라고 세 치 혀를 놀린다

비정치적인 것은 없지만

어떻게 무책임한 정부에 대한 허망한 주권자들의 질책조차 

슬픔을 정치에 이용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오히려 그렇게 말하는 이들이

시민들의 정당한 추궁을 정치적으로 곡해하는 것 아닌가

 

이 참사가 윤석열 정부가 아니라

문재인 정부에서 일어났다 해도 

달라지는 건 아무것도 없다

경찰과 소방을 미리 배치함으로써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할 수 있는 일은 다했다고 뻔뻔한 얼굴로 변명한다면 

똑같이 침을 뱉으며 책임을 물을 일이다

 

희생자들의 앳된 얼굴과 이름을 지운 채

더 적게 애도하고

더 빨리 잊히게 만들려는 이들

저들의 억울한 죽음을 다시 외면하고

정치적 이해타산을 따지는 이들에 맞서

지금은 애도를 멈춰야 한다

 

참담한 눈물을 삼키고

참사의 진상을 낱낱이 밝혀

책임져야 할 이들을 발본해야 한다

그것이 희생자들에 대한 합당한 경의이며 애도이고

슬픔을 치유하는 첫걸음이다

그래야 희생자들은 유령처럼 되돌아오지 않고

우리도 그들의 영정을 어루만지며

머나먼 길 떠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잊지 않겠습니다

당장은 슬픔을 억누르고

애도하지 않겠습니다

 

 

 

순천향 병원에 도착한 후에도 제대로 안치되지 못한 이태원 참사 희생자 시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