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로교 간판만 걸어놔도 사람들이 밀려온다"
성도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있었던 말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가톨릭이나 불교와 달리 1990년대부터 뚜렷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교세 축소를 걱정해야 할 단계를 넘어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나는 2000년대 초반 지인들에게 한국 개신교가 망하는데 10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5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계시"를 받는 중이다. 어쩌다가 한국 개신교는 깨어있는 내부자들에게는 슬픔의 대상이 되고 외부자에게는 비웃음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는가?
일말의 애증으로 헤아려 보자면 그 근저에 "성경 우상 숭배"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배타주의와 싸우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했던 한 목사이자 신학자에게 들은 표현이다. 교회에서 나온 후 한동안 잊고 지냈으나 저 말의 의미를 새롭게 생각하게 된 계기가 있었다. 오래 전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을 읽으면 서다. 성경 우상 숭배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어떤 것일까? 문자적으로는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숭배하는 것이다. 이는 성경을 하나님보다 우위에 두는 것으로 성경이라는 책 안에 하나님을 가두는 것이다. 신이 아니라 성경의 글자 하나하나를 숭배하는 것이다.(성경축자무오설)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전제하고, 성경이 누구에 의해 언제 어떤 목적으로 어떻게 작성되었는지에 대한 합리적 이해와 어떻게 어떤 과정을 통해 정경화 되었는지에 대한 역사적 사실은 외면된다. 성경은 어느 기독교 신흥 교단이 주장하는 그들의 경전처럼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이렇게 본말은 전도된다. 성경에 어떤 가치가 있다면 그것은 성경을 읽고 난 후에 발견되는 무엇이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성경은 애초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제된다. 성경에 나오는 오류나 모순(인터넷에서 잘 정리된 관련 자료를 볼 수 있다)에 대한 합리적 의문은 불경으로 간주된다. 그것은 "이미" 하나님의 말씀이기 때문이다. 성경의 이야기들을 말도 안되는 방식으로 끼워 맞추는 일이 강해나 설교라는 형식으로 자행되는 것도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이 땅의 "검은 삯꾼들"은 하나님이 아니라 성경을 숭배하고 자신의 공소한 믿음을 성경을 통해 견강부회하는 특징이 있다. 조심하시라. 악마도 성경을 인용한다. "본문 없는 이단은 없다."(geen ketter zonder letter [There is no heretic without a text.]) 성경이 이미 하나님의 말씀으로 전제된 이상, 그곳에서 그들 입맛에 맞는 어떠한 구절을 인용하더라도 그것은 하나님의 말씀이 되고 만다.
이런 상황에서 성경에 나와 있는 수 많은 예언이나 기적, 종교의식과 율법, 선민사상 등은 본래적 의미와 의의를 잃고 오히려 "미신"(Superstitio)을 강화하는 원천이 되고 만다. 이러한 믿음이 니체가 말한 것처럼 "어떤 것이 참이어야 한다고 (스스로를) 어리석게 만드는 내적 강제"에 불과한 "신성한 병"임은 두말할 나위 없다. 덮어놓고 믿는 자는 그들 사이에서 신앙이 좋은 자로 칭찬받게 되고, 의문을 갖고 질문하고 토론하려는 자는 믿음이 부족하거나 불경한 자로 낙인찍힌다. 스피노자의 <신학정치론>은 성경에 대한 저 거짓 선지자들의 이해를 저들의 방식대로 철저히 "성경에 근거"하여 통렬히 고발한다. 예언은 상상에 불과하고, 선민사상은 국가 이데올로기에 다름 아니며, 성서는 신의 본질에 대한 합리적 고찰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네 이웃을 내 몸과 같이 사랑하라"는 도덕적 권고가 핵심인 책에 불과하다.
기독교가 단순히 폐기되어야 할 미신이 아니라 제 자리를 찾아야 하는 것으로 이야기되는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성서와 기독교의 본질에 충실하게 해야 할 것을 하고 하지 말아야 할 것을 삼간다면, 기독교는 여전히 "근본 가르침"(宗敎)으로서 그 필요와 의의를 회복할 수 있다는 것이다. 실상 "무지"에 기인하는 성경 우상 숭배에서 벗어나 성경 고유의 목적과 역할을 깨닫는다면, 성서 역시 여전히 '성'(聖)서로서의 가치와 의미를 지니게 된다. 한국 개신교가 이 지경이 된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회가 있어야 할 자리에서 이탈해 권리를 주장하고, 성경이 철학과 과학의 영역에 침범하며, 전광훈, 조용기, 김삼환 같은 삯꾼들이 나약한 인간들의 희망과 공포, 불안, 무지 속에 파고들어 그들을 미신에 불과한 신앙으로 포획했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기독교와 무관하다. 바로 그들이 신봉해 마지않는 성서에 그들을 위해 준비된(?) 적실한 이야기가 있다.
"나더러 '주님, 주님!' 하고 부른다고 다 하늘 나라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다.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을 실천하는 사람이라야 들어간다. 그 날에는 많은 사람이 나를 보고 '주님, 주님! 우리가 주님의 이름으로 예언을 하고 주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고 또 주님의 이름으로 많은 기적을 행하지 않았습니까?' 하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그때에 나는 분명히 그들에게 '악한 일을 일삼는 자들아, 나에게서 물러가거라.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할 것이다."(공동번역 마태오복음 7장 21~23절)
기독교가 성경의 문자 하나하나를 숭배할 때 그것은 스피노자가 지적한 것처럼 "미신"에 불과하다. 사실 한국 개신교의 대개는 미신이 된 지 오래다. 대부분의 교단이 사실상 성경무오설을 신봉하거나 용인하기 때문이다. 자정 능력이 있을까? 단언컨대, 없다. 문제 상황은 성경 우상 숭배가 한국 개신교의 "교파주의"와 "개교회주의" 같은 구조적 문제와 맞물려 오히려 심화된다는 점이다. 우리가 "개신교"라고 부르는 저 교회들은 결코 "그리스도의 하나된 몸"이라고 할 수 없을 정도로 분열되어 있다. 선교 초기부터 교회 분열이라는 비극적 씨앗을 품고 자란 개신교는 무려 370개가 넘는 분파들로 갈기갈기 찢겨졌고(https://www.newsnjoy.or.kr/news/articleView.html?idxno=221853, 전 세계에서 유래가 없는 분열이다!), 이름조차 헛갈리는 "한국기독교총연합회"(저 유명한 삯꾼 전광훈의 한기총), "한국교회연합", "한국교회총연합", "한국기독교교회연합" 교단 연합 단체조차 교회 일치 운동이라는 차원에서 보면 사실상 유명무실하다. 교단 신학 교육의 질적 수준은 점점 떨어지고 개교회주의라는 구조적 한계 속에서 교단의 신학적 정체성을 기대하기도 힘들다. 민중신학의 위대한 전통을 가진 기장에도 조용기 같은 목사가 있고, 종교다원주의와 토착화 신학의 신학적 유산을 상속받은 감리교에도 전광훈 같은 목사가 있다. 김홍도, 김삼환 목사의 사례처럼, 교단은 개교회 목사, 특히 거대 교회 목사들에 대한 통제권이 거의 없다. 가톨릭에는 교황이 한 명 있지만, 한국 개신교는 개교회 숫자만큼의 교황이 있다는 자조가 나오는 이유다.
성경 우상 숭배와 한국 개신교의 구조적 문제를 개선하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건전하고 합리적인 신학교육을 통한 일정 수준의 성직자를 통합적으로 양산하는 시스템이 긴절하다. 그러나 다시 단일 종교라고 보기 어려울 정도의 이질적 교파가 난무하는 한 이해관계를 조정하고 공동 신학교육을 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 보인다.(몇 안 되는 연합신학대학원조차 통합 교육을 통한 공동 목회자 양성이라는 취지가 무색하게 운영되고 있다.) 어떤 교단은 성직자가 되기 위해 6~7년이기 걸리기도 하는데, 전광훈처럼 1~2년 기계적인 성경 "읽기"와 "암기"를 통해 목사가 될 수 있는 교단이 허다하다. 그나마 건전한 축에 속한다는 교단들도 사실상 성경 암기나 다름없는 유치한 시험을 치르게 한 후 신학대학원 3년 간 속성으로 신학을 가르치고 있는 실정이니 미래는 암울하다. 수십 년이 지난 후에도 한국 개신교가 지금과 다르지 않을 것임은 현재 목회자 양성 시스템을 볼 때 분명하다. 똑같은 놈들이 계속 교회를 이끌어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구심점도 주체도 없는 상황에서, 개신교라 불리는 저 단체들의 조직적이고 통일적인 자정은 기대할 수 없는 노릇 아닌가.
그러나 개신교 정화의 희망이 보인다. 곧 망할 것 같기 때문이다. 개신교의 저 패악함에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돌 위에 돌 하나 남기지 않고"(마가복음 13:1~13) 저들의 무리를 쓸어버릴 예정이었나 보다. 마음 아프다. 환부를 도려내는 것으로 치유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좋겠지만, 가능한 시기는 지난 것 같다. 이젠 죽는 수밖에 없다. 죽어 아무것도 없는 상황에서 아무도 그 이름을 기억하지 못할 때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는 수밖에 없다. 신앙의 무게를 짊어지고 고민하고 공부하며 실천하는 참된 신앙인들이여, 너무 슬퍼 마시라. 한국 개신교가 자멸하고 흔적도 없이 사라질 그날, 본훼퍼가 말하는 "싸구려 세례"를 받은 이들이 이 땅에 사라진 그날, 저 삯꾼들이 그들이 믿는 하나님 앞에서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는 말을 듣는 그날, 그날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이 다시 "거룩히 여김을 받는" 날의 시작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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