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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승복과 한자

1.

다음 문장을 읽고 아래 문제에 답하시오.

 

"일심이문의 논리는 ‘개합자재開 合自在 입파무애立破無碍’(無所不立 無所不破)이다."

"원효는 개합자재의 논리적 근거를 '입이부득立而不得'과 '파이무실破而無失'에 두었는데, 여기서 입이부득은 바로 '무불립이자견無不立而自遣'이다."

 

문제: 위 문장은 한국어인가? 

 

 

2.

불교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불교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한자어 개념들에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경은 진속眞俗이 쌍민雙泯함이요, 지는 본시本始의 양각兩覺이다. 쌍민하나 불멸이고 양각이나 무생無生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진속쌍민眞俗雙泯은 곧 진속구공眞俗俱空, 즉 비진비속무변부중지중도非眞非俗無邊不中之中道를 의미이며, 일즉이一卽二․동즉이同卽異의 관계, 즉 양자의 어느 것도 그 자체로 존립하지 않는다는 의미에서 독자적인 구별로서의 양자는 모두 없어진 것이기에 쌍민이고 구공인 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양자가 융이불일融二不一이고, 불일이융이不一而融二로서는 불멸이고 불공不空인 셈이다."

 

김용옥이 무려 20년 전에 일갈했듯이, 위와 같은 문장은 "I는 school에 go한다"는 문장과 다르지 않다.

 

 

3.

학술서나 학술논문에만 국한된 상황이 아니다. "요익중생"의 말뜻을 찾아보기 위해 검색을 했을 때, 모 교수의 "원효 에세이"란 제목의 글에는 다음과 같은 번역이 있었다.

 

"일체 유정이 시작을 알 수 없는 아득한 그 옛날로부터 무명의 긴 밤 속에서 망상의 큰 꿈을 꾸고 있다. 보살이 관(觀)을 닦아 무생을 알았을 때, 중생이 본래 적정(寂靜)하고 다름 아닌 본각(本覺)임을 깨달아 한결같이 그러한 자리에 눕게 되면, 그때 이 본각의 힘으로써 중생에게 이익을 주는 것이다"

 

"요익중생"의 말을 풀이한 글이니 만큼 앞의 인용문보다는 좀 낫지만, "일체 유정", "관을 닦다", "무생", "본각" 같은 말은 여전히 막연하다. 

 

평범한 중생들이 독자층일 어느 불교신문의 에세이에 "이 가을, 불자로서 요익중생(饒益衆生)과 전법도생(傳法度生)의 역할을 다하는 것이 아닐까 한다." 같은 문장이 아무렇지도 않게 등장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나무 목부의 한자들-이미지 출처: 존 한자사전(www.zonmal.com)

 

 

 

4.

불교계의 관행은 한자와 우리말의 독특한 관계 및 역사와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중생들이 한글 전용 세대인 상황에서 불교 성직자나 지도자들의 언어 사용 관습은 의도와 무관하게 지배에 복무하는 효과 외에는 다른 것을 기대하기 어렵다. 성직자나 지식인 앞에서 선 불자들은 의사 앞에선 환자들처럼 알아들을 수 없는 고급하고 '성스러운' 언어 앞에서 자신의 무능을 확인하고 그들에게 의존하며 급기야 예속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한문은 물론 산스크리트어도 배운다면 불교의 심원한 진리를 이해하는데 필시 도움이 될 것이다. 그러나 이는 불교학자나 성직자가 해야 할 일이지 일반 불자들에게 요구할 일은 아니다. 지식인은 범어든 한자든 배워 교양대중의 계몽에 복무할 책무가 있다. 중국불교가 산스크리트어를 한자로 번역했듯이 음역이 '정말' 불가피한 경우 외에는 한자로 된 불교용어들도 한글 토착화가 필요하다. 지금이 한자를 쓰는 조선시대가 아니지 않는가? 사실상 한국전쟁 이후 세대들, 특히 박정희가 한글전용 정책을 펼친 이후 세대에게 한자는 우리의 글삶에서 완전히 타자화되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고등교육을 받은 이들도 사정이 크게 다르지 않다. 

 

한자 교육을 강화해서 대중들이 "일심이문의 논리는 ‘개합자재開 合自在 입파무애立破無碍’(無所不立 無所不破)이다."라는 문장을 읽어낼 수 있게 하자는 것은 답이 될 수 없다. 이는 영어 교육을 강화해서 "I는 school에 go한다."는 문장을 읽어낼 수 있게 하자는 주장과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애초 "나는 학교에 간다"는 말을 "I는 school에 go한다"라고 식으로 하면 안된다. 당장 우리말 도착어가 출발어의 내포를 다 가지고 있지 않아 문제가 되는 것 같아도, 이는 도착어가 새로운 내포를 갖도록 노력하여 타개할 일이지 개합자재니 입파무애니 하는 출발어의 특정 표현을 고수해야 할 이유가 되지 않는다.  

 

 

5.

더구나 대승의 정신을 고려할 때 중생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한자어 사용은 대승의 정신 자체에 반하는 일 아닐까. 대승의 알속이 민중에 대한 "대자비"에 있다면 말이다. 

 

“그러나 이러한 소승의 태도는 자기의 해탈만을 목적으로 하는 이기적(利己的) 자기(自己) 분상(分上)으로 보아서는 무방하다 하겠으나 그러나 일체 중생을 제도하는 자각(自覺) 각타(覺他) 각행원만(覺行圓滿)의 불교 본래의 목적에서 볼 때 탓하지 않을 수 없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진흙에 빠진 사람을 구할려면 자신도 진흙에 빠지지 않고서는 될 수 없듯이 오탁악세(五濁惡世)의 고해(苦海)에서 생사윤회(生死輪廻)하는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 속에 뛰어들어 더불어 웃고 우는 웃음과 눈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이니 이것이 곧 대승보살들의 대자비(大慈悲)인 것이다.”(강조 인용자)

 

대승 정신을 설파하는 글에서도 교양 대중에게도 낯선 한자가 사용하는 행태는, 불교 성직자나 지식인이 자기 만족이나 자기 스타일을 고집하는 것이라고 본다면 무방하겠으나, 중생을 열반으로 인도하고 깨달음과 행함의 일치를 추구하는 불교 본래의 목적에서 볼 때 탓하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다. 한글을 쓰는 사람을 구하려면 자신도 한글을 쓰지 않고서는 될 수 없다. "중생들을 구제하기 위해서는 자신도 그 속에 뛰어들어 더불어 웃고 우는 웃음과 눈물이 없이는 불가능"한 것처럼 말이다. "이것이 곧 대승보살들의 대자비(大慈悲)"라면 한글 사용은 그 자체가 자비행의 시작일 것이다.

 

 

6.

어떤 불교 학술 대회에서 군데군데 승복을 입은 스님들을 보고 묘한 느낌을 받은 적이 있다. 대부분 서양 복식을 착용한 일반 대중들 속에서 대중들의 복식 양식과 아주 다른 승복을 입고 있는 모습이, 한글을 주로 사용하는 일반 대중들 속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한자를 쓰고 있는 양상과 닮았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승복이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일반 대중들은 서양 복식을 착용하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승복은 잿빛으로 구분되긴 하나 당시의 복식 양식에 비춰 그렇게 이질적인 것은 아니었다. 마치 서양 복식 양식 내에서 가톨릭의 사제복이 완전히 낯선 것은 아니듯이 말이다. 그러나 21세기 한반도 인민들의 복식은 완전히 서양식이 되었다. 스님들의 승복이 가톨릭 사제의 사제복보다 더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다.

 

"한글세대"라 불리는 1970년부터 1972년 사이 중·고등학생이던 세대가 이미 노년이다. 사회 구성원 전체가 거의 한글세대다. 그러니 대부분의 대중들에게 위에 인용한 문장 속 한자어가 마치 서양의복을 입고 있는 대중들 가운데 전통 승복을 입고 있는 스님처럼 이질적으로 느껴지는 것은 당연하다.  

 

개인적으로 승복이 현세대 복식 문화와 어우러진 모습이라면 더 좋을 것 같다. 그러나 승복 따위야 언어에 견준다면 사소한 문제다. (당신들의 언어 습관대로 말하자면) 지배자의 언어를 "일미관행"으로 타개하고 대중들의 "요익중생"을 꾀하는 것이 필요한 시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