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쿠분 고이치로의 <중동태의 세계>(동아시아, 2019)를 읽다 몇 자 쓴다. 책 내용에 관한 것이 아니다. 우리 학계, 출판계의 관행 문제다. 요즘 철학 관련 번역서 시장에 일본 저자들의 저작 번역이 심심치 않게 눈에 띈다. 위에 언급한 고이치로, 우치다 타츠루, 에가와 다카오, 아즈마 히로키, 지바 마사야, 우노 구니이치, 미우라 도시히코 등 대륙철학은 물론 분석철학 관련 저작도 있다. 주로 유행하는 철학에 대한 해설서류의 2차 문헌들이다. 서양의 철학서 번역과는 또 다른 긍정적 측면이 없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1차 문헌의 표준 번역본도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해설서류의 2차 문헌이 난무하는 문제점은 차치하더라도, 이들 번역서에서도 우리 철학계의 고질적 문제가 여전히 반복, 심화되는 느낌이다. 우리 철학계의 타자화 문제가 그것이다.
먼저 번역서에 인용된 저서의 우리말 번역서를 타자화시키는 경우가 적지 않다. 그들이 자국의 번역서를 인용하듯이 우리도 번역서에 인용된 저서가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다면 우리말 번역서를 찾아 인용해 주고 그 출처 또한 밝혀주어야 한다. 그래야 연구의 토대가 되는 저술들이 유기적으로 연결될 수 있고 연구자나 일반 독자가 책에서 책으로 자유롭게 유랑할 수 있는 길이 열린다. 저작들의 ‘하이퍼 텍스트화’가 필요한 것이다. 서양의 철학자들은 물론 일본 철학 연구자들도 바로 그렇게 하지 않는가. 당장 고이치로가 인용하는 방식 자체가 이를 잘 보여준다.
둘째, 첫 번째와 연결된 문제인데, 번역서는 우리 학계를 타자화시키고 있다. 마치 우리 학계는 번역서가 다루는 문제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는 듯이 취급해서는 안 된다. 우리 학계에서 논의된 성과, 특히 학계에서 어느 정도 자리 잡은 번역어를 찾아 반영해 주어야 한다. 그래야 번역어와 관련된 번거로운 일련의 일들(이 번역어가 이 번역어였어?)을 최소화하고 독서와 연구 자체에 집중할 수 있으며, 번역서가 제기하는 문제도 우리 문화에 안착될 수 있다. 일본 학계가 서양의 개념을 번역하기 위해 어떠한 노력을 기울여 왔는지, 일본 철학서를 번역하는 역자들이라면 모르지 않을 것이다.
셋째, 앞선 문제들로 인해 번역서는 스스로를 타자화시키고 있다. 우리 문화의 일부, 우리 학계의 자산이 되지 못하고 섬처럼 떠 있는 것이다. 이때 번역서가 기여하는 것은 자신의 책이 다른 나라 언어로 번역되었다는 원저자의 만족 외에 무엇이 있을 수 있을까. 번역서는 누구를 무엇을 위한 것인가. 도착어를 사용하는 이들을 위한 것 아닌가. 번역서 한 권이 우리 문화와 학계의 일부가 되려면 독자들이 진공 상태에 있지 않음에 유의해야 한다. 독자들은 엄연히 나름의 역사와 문화적 문맥 위에 있다. 번역서가 이를 고려하지 않는다면 지금처럼 외따로 떨어 있는 부표 신세를 면하지 못할 것이다.
서양철학 수입의 역사 100여 년을 돌이켜 볼 때 일의 선후나 경중에 대한 고려가 불충분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경쟁적으로 혹은 떠밀려 서양철학서들을 번역해 왔지만, 그것이 철학에 관한 우리의 논의를 얼마나 풍요롭게 했는지 의문이다. 최근 10여 년 동안 국가적 지원이나 연구자들의 자각으로 상황이 적잖게 좋아진 건 사실이다. 그러나 갈길이 멀다. 잘 활용만 된다면야 일본 철학서뿐만 아니라 어느 나라의 철학서든 도움이 되지 않겠는가. 잘 활용되기 위해서는 그것이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그러기 위해서는 어떠한 물질적 토대가 필요한지 물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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