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인간의 역량(potentia)은 극히 제한적이며 외부 원인의 역량에 의해 무한하게 압도된다. 이에 따라 우리는 우리 바깥에 있는 실재들을 우리의 사용에 맞춰 조정하는 절대적 능력(potestas)을 갖고 있지 않다. 하지만 우리는 우리가 할 일을 다했으며, 우리가 가진 역량은 우리가 이 일을 피할 수 있게 하는 데까지 미치지 못했다는 것, 그리고 우리는 우리가 그 질서를 따르는 자연 전체의 일부분이라는 것을 우리가 의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의 유용성의 원칙이 요청하는 것과 상반되게 일어나는 것을 평정하게 견뎌낼 것이다. 만약 우리가 이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한다면, 지적 능력에 의해 정의되는 우리의 부분, 곧 우리의 더 나은 부분은 이에 대해 기꺼이 만족할 것이며, 이러한 자족감 속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할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가 인식하는 한에서 우리는 필요한 것 이외의 어떤 것도 추구하지 않을 수 있으며, 오직 참된 것에서만 절대적으로 만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따라 우리가 이것들을 올바르게 인식하는 한에서, 우리의 더 나은 부분의 노력은 자연 전체의 질서와 합치하게 된다.”(스피노자, <윤리학> 4부 부록 32항)
우리의 역량을 능가하는 외부 원인은 수 없이 많다. 물리적이고 생물학적인 제약도 있을 것이고 강고한 사회적 편견이나 개인적 오해 같은 것도 있을 것이다. 우리에게는 필요에 따라 그것을 좌우할 능력이 없다. 우리는 자연의 일부이다. 따라서 자연을 지배하는 법칙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더구나 자연 안에는 우리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들이 수 없이 많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에게는 피할 수 없는 일이 있고 사태는 우리의 바람과 달리 흘러갈 수도 있는 것이다.
원하는 바를 이루지 못했을 때 일어나는 정념 중 하나는 후회다. 스피노자에 의하면 후회(Poenitentia)는 “내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슬픔”이다.(<윤리학> 3부 정리30의 주석) 자신의 미흡한 능력, 지나온 시간의 불성실 등을 후회하고 자신을 탓할 수 있다. 때로는 사회적 편견과 제도와 관습, 타자 등 외부의 것을 탄식하고 저주하기도 할 것이다. 일어날까 두려웠던 일이 일어나게 되면 낙담에 빠지기도 한다.
스피노자는 우리에게 이러한 상황 속에서 좌절하고 체념할 것이 아니라 이 일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임을 인식하라고 요구한다. 인식은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이자 최고의 목표이다. 인식할 수 있을 때 우리는 우리 자신에게 해로운 슬픔의 정서에서 벗어나 상황을 평정하게 견뎌낼 수 있다. 우리가 원하는 바대로 일이 진행되지 않을 수 있는 이유를 명석판명하게 인식한다는 것은 결국 자연 전체의 질서에 부합하는 적합한 인식을 갖는다는 것을 의미한다. 스피노자는 이때 우리가 ‘만족’할 수 있고 ‘자족감 속에서 존속하려고 노력’하게 된다고 주장한다.
무엇에 만족할 수 있다는 것인가? 스피노자에 의하면 자족감(Acquiescentia)은 “내부 원인의 관념을 수반하는 기쁨”이다.(<윤리학> 3부 정리30의 주석) 여기서 내부 원인은 인식 역량 또는 덕(능력/실력, virtus)이다. 즉 자신의 인식 역량에 대한 관념에 수반되는 것이 자족감이다.(<윤리학> 4부 정리52) 우리의 인식 역량이 “자연 전체의 질서에 부합하는 적합한 인식”에 도달할 때, 우리는 우리가 지닌 인식 역량을 흡족해 할 것이다.
스피노자는 사태를 적합하게 인식한다면, 우리는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한 것을 추구할 수 있다고 조언한다. 자연(여기에는 나 자신도 포함된다)을 부적합하게 인식하기 때문에, 불가능하거나 우리에게 진정으로 필요하지 않은 것, 때로는 우리에게 해가 되는 것을 원하게 된다. 진정한 만족이 “오직 참된 것”에서만 가능한 것은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 적합한 인식을 가질 때 적합한 인식에 기초한 우리의 노력은 자연 전체의 질서와 합치하게 된다. 자유의 조건은 바로 이것이다 .
진정한 긍정은 부정의 긍정이 아니다. 이 세계의 온갖 부정적인 일을 긍정적으로 보는 세속의 값싼 긍정은 진정한 긍정이 아니라 외면과 도피이며 무지와 무사유의 소산일 뿐이다. 진정한 긍정은 긍정의 긍정으로, 일어난 일, 일어날 수밖에 없었던 일, 지금 일어나는 일을 그 원인에 필연화된 일로, 있는 그대로 긍정하는 것이다. 존재가 이와 같은 이유에 대한 적합한 인식이 곧 일어난 일에 대한 진정한 긍정인 것이다. “난폭한 운명의 돌팔매와 화살” 속에서 운명을 긍정할 수 있는가? 여기에 운명애의 역설적 자유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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