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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

다만 인식하라!

 

 

"우리가 저열한 육욕에 지배된 사람의 본성을 고찰하고 그가 현재 지닌 그런 욕구와 정의로운 사람들에게 있는 욕구를, 또는 다른 때에 그가 지닌 욕구를 비교할 경우, 우리는 이 사람이 더 좋은 욕구가 결핍되어 있다고 인정합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그에게 덕에 대한 욕구가 속해 있다고 판단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신의 결정 및 지성과 관련시켜 볼 경우 우리는 그렇게 할 수가 없습니다. 왜냐하면 이 경우 그런 더 좋은 욕구는 지금 이 순간 악마나 돌멩이의 본성에 속해 있지 않은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의 본성에도 속해 있지 않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이런 관점에서 볼 때 더 좋은 욕구의 결핍이 아니라 단지 부정이 있을 뿐인 것입니다."(「편지21」) 

 

 

 

자연 안에는 어떠한 결함 때문에 우리가 슬퍼하고 비웃고 경멸하고 저주할 일이 일어나지 않는다. 일어나는 모든 일은 필연적인 것이며 그 자체로는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아니다.(<윤리학> 4부 서문) “인간의 무능력과 불안정함” 또한 인간 본성이 지닌 어떤 악덕 때문이 아니라 다른 모든 자연에도 적용되는 공통적인 역량에 기인하는 것일 뿐이다.(<윤리학> 3부 서문)

 

스피노자는 “부정(negatio)과 결핍(privatio)”을 구분하라고 권고한다. "결핍은 한 사물에 대해 우리가 그것의 본성에 속해 있다고 판단하는 속성을 부정하는 데 있다." 시각장애인의 시력에 대해 우리가 어떻게 생각하는지 보라. 우리는 그에게 시력이 결핍되어 있다고 말한다. 이는 사람의 본성에 시력이 속한다고 보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는 "맹인의 본성을 다른 개체들의 본성이나 그의 과거 본성과 비교함으로써 그를 고찰할 경우 우리는 시력이 그의 본성에 속한다고 인정하게 되고 따라서 그가 시력이 결핍되었다"고 말하는 것이다. 즉 결핍은 "우리가 사물들을 서로 비교할 때 형성하는 사유의 양태[방식]"에 불과하다. 같은 방식으로 우리는 흔히 사람의 손의 본성에는 손가락이 5개임이 속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손가락이 4개라면 손가락 한 개가 '결핍'되어 있다(즉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말한다. 이것이 "결핍의 관점"이다. 요컨대 실재를 결핍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우리가 사물들을 비교함으로써 갖게 된 사유의 양태에 불과한 어떤 것을 어떤 실재의 본성에 속한다고 판단하고 그 실재가 그 속성을 결여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실재를 "순수한 부정"의 관점에서 보는 것은 지금 어떤 것의 본성에 속해 있지 않은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예컨대 돌멩이의 시력을 부정하는 것은 실제로 돌멩이의 본성에 없는 것을 부정하는 것이다. 있어야 할 것이 없다고 보는 것이 아니라 자연의 필연적인 인과 질서 속에서 지금 돌멩이의 본성에 없는 것이 당연한 것을 없다고 보는 것이 "순수한 부정의 관점"이다. 한 시각장애인의 시력을 부정하는 것도 마찬가지다. "신의 결정과 이 결정의 본성을 고찰할 경우 우리는 돌멩이가 시력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그 사람이 시력을 상실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바로 이 순간 시력이 돌멩이에게 속하는 것 모순인 것처럼 그에게 시력이 속한다는 것도 역시 모순일 것이기 때문입니다." 철수는 손가락은 5개이어야 하는 데 4개인 것이 아니다. "결핍의 관점"은 손가락이 마땅히 5개이어야 하는데 하나가 없다는 보지만, "순수한 부정"의 관점은 지금 그의 손가락이 4개인 것은 실재의 필연적 인과 연관 속에서 그렇게 된 것이므로 그의 본성에 손가락이 5개임이 속해 있지 않음을 당연하다고 본다.(이상 편지21) 따라서 순수한 부정의 관점은 실상 존재에 대한 "순수한 긍정"이다. 사유의 양태에 불과한 존재의 본성에 근거하여 존재를 결핍과 과잉(과잉은 결핍의 거울이미지다)의 관점에서 판단하지 않고 지금 존재하는 것에 속하는 본성을 있는 그대로 긍정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흔히 자연과 인간에게 어떤 불완전함이 있다고 할 때, 그것은 사실 있어야 할 어떤 것을 결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그에게 없을 수 밖에 없는 어떤 것이 없는 것일 뿐이고, 따라서 사실 불완전하다고 할 수도 없는 것이다. 왜 슬퍼하고 비웃고 경멸하고 저주하는가. 자연이나 인간 안에 없는 것을 순수한 부정이 아닌 결핍으로 인식하기 때문이다. 있어야 할 무언가가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이 지금과 같음이 그 원인에 의한 필연적 사태임을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어떤 것에 대해 무언가를 하고자 하는가? 그러면 그것의 본질이라고 가상하는 것에서 출발해선 안 된다. 그 종착지는 비웃음과 저주, 기껏해야 슬픔이다. 그것을 지금의 바로 그것으로 있게 한 원인을 인식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래야 실재에 대한 부적합한 인식에 기인하는 정념과 잘못된 처방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 그러니 스피노자는 말한다. 비웃지 말고 슬퍼하지 말고 저주하지 말고 다만 인식하라!”(Non ridere, non lugere, neque detestari, sed intellige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