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류 전체보기 (27) 썸네일형 리스트형 자유의지의 부정(1): <윤리학> 2부 정리48-49 데카르트는 의 "네 번째 성찰"에서 지성(intellectus)과 의지(voluntas)를 구분한다. 지성은 실재에 대한 관념을 지각하는 정신의 능력이다. 의지는 지성이 인식한 것을 하거나(긍정하거나 추구하거나 믿거나) 또는 하지 않기로(부정하거나 피하거나 믿지 않기로) 결정하는 정신의 능력을 말한다. 지성이 실재를 파악하는 정신의 "인식 능력"이라면, 의지는 지성이 파악한 것을 하거나 하지 않는 것을 결정하는 "선택 능력, 즉 자유 의지"이다. 데카르트에 의하면 지성이 의지로 하여금 긍정하거나 부정하도록 혹은 추구하거나 피하도록 어떤 것을 제시할 때, 의지는 그러한 "외부의 힘에 의해 이미 결정되어 있지 않다고 느끼면서 그렇게[긍정하고 부정하고...] 하는 데에 존립"한다. 그는 비결정성을 "가장 낮은.. 우울할 땐 세로토닌 며칠 째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다 항우울제를 다시 복용해 볼까, 생각한다 아직 적잖게 남아 있고 많이 힘들면 더 먹으라고 준 자나팜 0.25밀리그램은 작은 약통 안에 거의 그대로 있다 ... 높은 건물 위에서 아래를 내려다본다 자살에는 전조가 있고 주변에 보내는 신호가 있다고 한다 그럴 것이다 돌이켜 보면 가슴 한편에 아프게 남아 있는 후배도 그랬던 것 같다 그러나 결행의 순간은 서서히 소진된 인간의 최후의 임계점은 이전의 순간과 연속적이지 않고 이전의 인과로 환원되지 않는 그래서 아무도 모르게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사건 아닐까 ... (어쩌면 몽상인지도 모를) 꿈을 꾸었다 저편에서 한 사내가 걸어와 손을 내민다 잡고 보니 아직 도래하지 않은 시간에서 온 나인 것 같다 나는 내가 낯설었는데 지나온 시간에 .. 타블로(Tablo), <집> (Feat. 이소라) 내게 행복할 자격 있을까? 난 왜 얕은 상처 속에도 깊이 빠져있을까? 사는 건 누구에게나 화살 세례지만 나만 왜 마음에 달라붙은 과녁이 클까? 감정이 극과 극 달리고, 걸음 느린 난 뒤떨어져 숨 막히고 내 맘을 못 쥐어. 세상을 놓쳐. 몇 걸음 위 행복인데 스스로 한단씩 계단을 높여. 누구에겐 두려운 일 하지만 내겐 웃음보다 자연스러운 일. 사람이 운다는 것은 참을수록 길게 내뱉게만 되는 그저 그런 숨 같은 일. Let me breathe. 슬픔이 내 집이잖아. 머물래 난, 제자리에. 잠시 행복 속으로 외출해도 반듯이 귀가할 마음인 걸 이젠 알기에. 버닝 : 삶의 의미? “나 요즘 팬터마임 배우고 있잖아.” “그런 걸 왜 배워? 배우 될려구?” “야, 배우는 아무나 되니? 그냥 재밌어서 배우는 거야.” 첫 번째 의문, 마임이 왜 재밌을까? 더보기 “봐봐. 난 내가 먹고 싶을 때 항상 귤을 먹을 수 있어.” “잘하네, 재능 있네.” “이건 재능으로 하는 게 아니야. 뭐냐면, 여기 귤이 있다고 생각하지 말고 여기에 귤이 없다는 걸 잊어먹으면 돼. 그게 다야. 중요한 건 진짜 먹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어.” 마임이 재밌는 것은 없는 것을 있게 해 주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귤이 없는데도 마임은 입에 침이 나오고 진짜 맛있게 한다. 해미(전종서)는 연기할 대상이 있다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그것이 없다는 걸 잊어버리고 욕망하면 된다고 말한다. .. "나는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한다." "장로교 간판만 걸어놔도 사람들이 밀려온다" 성도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하던 1960-70년대에 있었던 말이다. 그러나 한국 개신교는 가톨릭이나 불교와 달리 1990년대부터 뚜렷한 하향곡선을 그리기 시작하더니, 이제는 교세 축소를 걱정해야 할 단계를 넘어 "공공의 적"이 되었다. 나는 2000년대 초반 지인들에게 한국 개신교가 망하는데 100년도 채 걸리지 않을 것이라고 "예언"(?)한 바 있다. 그러나 이제는 50년도 걸리지 않을 것이라는 새로운 "계시"를 받는 중이다. 어쩌다가 한국 개신교는 깨어있는 내부자들에게는 슬픔의 대상이 되고 외부자에게는 비웃음과 저주의 대상이 되었는가? 일말의 애증으로 헤아려 보자면 그 근저에 "성경 우상 숭배"가 있다. 한국 개신교의 배타주의와 싸우고 종교다원주의를 주장했던..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여,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예수가 어떻게 기도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이들을 위해 알려준 기도문의 첫 구절이다. 주께서 알려주셨다 하여 "주기도문"이다. 기독교인들이 이 기도문보다 자주 외는 것은 없을 터인데, 그만큼 의미를 새겨보는지 의문이다.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받으시오며", 무슨 뜻일까? "여기다"의 사전적 정의는 "마음속으로 그러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하다"이다. "어여삐 여기다", "귀하게 여기다"처럼 쓴다. "간주하다", "인정하다", "생각하다" 정도가 유의어이다. "거룩하다"는 말은 "뜻이 매우 높고 위대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주기도문의 저 첫 구절은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를 사람들이 "하나님의 뜻은 높고 위대하다"(거룩하다)고 "인정하거나 생각".. 승복과 한자 1. 다음 문장을 읽고 아래 문제에 답하시오. "일심이문의 논리는 ‘개합자재開 合自在 입파무애立破無碍’(無所不立 無所不破)이다." "원효는 개합자재의 논리적 근거를 '입이부득立而不得'과 '파이무실破而無失'에 두었는데, 여기서 입이부득은 바로 '무불립이자견無不立而自遣'이다." 문제: 위 문장은 한국어인가? 2. 불교에 대해 아는 바 거의 없는 나 같은 사람이 불교 관련 자료를 찾아본다면, 평생 듣도 보도 못한 한자어 개념들에 적잖이 당황스러울 것이다. "경은 진속眞俗이 쌍민雙泯함이요, 지는 본시本始의 양각兩覺이다. 쌍민하나 불멸이고 양각이나 무생無生이다." 이 구절에 대한 해설로 다음과 같은 문장이 등장한다. "진속쌍민眞俗雙泯은 곧 진속구공眞俗俱空, 즉 비진비속무변부중지중도非眞非俗無邊不中之中道를 의미이며,.. 무로부터 나온 것은 없고 무가 되는 것도 없다 전체이며 또한 전체가 아닌 것, 한곳에 모이며 또한 따로 떨어지는 것, 함께 부르며 또한 제각기 부르는 것, 그리고 모든 것으로부터의 하나, 그리고 하나로부터의 모든 것. — 헤라클레이토스 고대 유물론자의 말처럼 무로부터 나온 것은 없고 무가 되는 것도 없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른 것이 되고 그렇게 내가 존재하고 나도 다른 것으로 바뀐다 존재의 생성 소멸은 있음과 없음의 점멸이 아니라 존재 변화의 매듭일 뿐이다 내가 된 타자와 현재의 나와 타자가 될 나는 모두 나이며 내가 아닌 것이다 백여 년 동안 엔트로피의 필연적 증가에 저항하며 정체성을 유지할지라도 인간은 결국 관계의 일시적 산물이고 다른 관계 속에서 새로운 차원의 생성에 참여할 존재의 일부인 것이다 물론 그렇게 존재하는 나와 나의 정체성이 아무것.. 이전 1 2 3 4 다음